사람들은 양이 일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마시는 일에 쓴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그들은 자주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낀다. 목자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양에게는
갈증을 식혀 줄 물과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먹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은 스스로는 물과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동물이다.
양은 물을 필요로
한다. 깨끗한 물, 순수한 물, 그리고 마시기에 적합한 물을 필요로 한다. 오염되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물이라야 한다. 너무 차도 안되고 너무 더워도 안된다. 또 그 물은 양에게 위험한 물이 되어서도 안된다.
너무 빠르게 흐르는 물은 양에게 적합치 않다. 양들은 선천적으로 '잔잔한 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물은
또 정체되어 있어 알칼리성을 띤다든지 해로운 화학성분이 함유된 물이어도 안된다. 양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해충이 알을 낳기 쉬운 늪이나 고여 있는 물이어도 안된다.
물은 양에게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을 찾아 양떼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먼
거리에서도 바람을 따라 물냄새를 맡을 줄 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먹이와 물을 찾아낸다. 인간의
도움을 거부하고도 불가사의한 감각으로 철을 따라 먹이를 찾아낸다.
아프리카의
'누'라는 동물은 먹이와 물을 찾아 수천 마일을 아동한다. 북반구의 광활한 오지에서 서식하는 북유럽산
큰사슴과 순록도 비슷한 거리를 이동해 먹이를 찾는다. 버팔로도 먹이를 찾아 광야를 가로질러 수백마일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존 본능으로 인간의 어떠한 도움 없이도 긴 이동과 가뭄, 홍수,
전염병, 추위, 열기를 이겨낸다. 그러나 오직 양만은 다른 동물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했다. 양은 있던
곳에서 풀을 다 먹어치우면 스스로 다른 초장을 찾을 줄 모른다. 그냥 정처없이 헤매다가 맨땅이 드러날 때까지
그루터기까지 먹어치운다.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아니면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푸른 초장이 있는데도
양들은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감지해 낼 줄도 찾을 줄도 모른다.
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단 물이 떨어지면 양들은 속수무책이다. 양들이 물 있는 곳에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10내지 15마일, 이는 그들이 이동했다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물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그 샘이 마르면 양들은 말라가는 진흙 땅을 서서 쳐다보면서 목말라 죽어가게 된다.
알젠티나 남부의
리오 네그로에 서식하는 양은 자갈밭에서 자라는 키작은 수풀을 먹고 산다. 거기서 양들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표면 바로 아래에는 안데스 산맥을 타고 내려온 풍부한 물이 있는데, 10마일
간격으로 세워진 풍차가 양이 마실 물을 끌어올려 물통을 가득 채운다. 양들을 씻기고 이유시키고 털을 깎기
위해 양들을 모아야 할 때면 목자는 일시적으로 물통의 물을 끊는다. 그러면 며칠 못가서 10마일 반경에 있는
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물통 주위로 모여서 갈증 어린 눈으로 빈 물통만 바라보고 서 있게 된다. 그러면
목자는 물길을 터서 양떼에게 물을 준 뒤 폭도들을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양들을 모을 수가 없다. 양들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다. 3에서 6피트 높이의 수풀은 양들이 단지 20야드만
떨어져 있어도 목자나 양치는 개를 볼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양치는 개는 양떼를 찾아 내거나 그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해 올 수가 없다. 양들은 물을 이용해서만 한 데 모을 수가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양치기를 들라면 스페인의 바스크 목동들을 말할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바스크 목동들은 엄청난 수의 양떼를
이끌고 스페인 북부나 프랑스 남부, 그리고 미국의 록키산맥 서부 지역의 높은 산을 오르내렸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려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고산 지대의 초장을 적셔 주면, 녹색의 풀과 꽃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곳에서 4,5개월을 보낸 양들은 여름 방목 기간이 끝난 후에 버터처럼 살져서 내려오게 된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 러시아, 카자흐, 시베리아, 이란 등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목동들은 매일같이 양떼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알젠티나, 브리튼,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 기름진 초원의 나라들에서 목동들은 계획을 세워서 수백만 마리의
양들에게 꼴과 물을 공급한다.
양들은 종종 너무
많이 먹기도 한다. 양들은 과식으로 괴로워하거나 인간들처럼 몸이 비대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양들은 언제
먹을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만큼 먹어야 할지까지 보살펴 주어야 한다.
양들은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기도 한다. 인간처럼 그들도 먹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또 영양가 있는 것을 골라서 먹지도
않는다. 양들의 주인이 부주의해서 양들의 먹이에 소홀해지면 양떼는 영양가나 비타민, 미네랄이 매우 적은 좋지
못한 초장에서 꼴을 먹게 된다. 양을 먹이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적절한 먹이를 공급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새끼를 뱄을 때나 새끼양에게 젖을 먹일 때는 더욱 그렇다.
들은 세심하게
돌봐 주지 않으면 독 있는 풀을 먹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독으로 알려진 것들 중 대다수가 초원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발견된다. 양들은 영양가 있는 풀과 그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풀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들은 독초를
알아보고 피할 줄 모른다.
이같이 상존하는
위험 때문에 양들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 목자는 치명적인 독초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서 양떼를 독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목자는 양떼를 초장으로 인도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초장을 점검해야 한다. 독초를
제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풀에 독이 제일 없을 때만 양떼를 초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목자가 계획을
세우고 꼴을 먹이고 양떼를 돌보고 먹이와 물에 대한 양떼의 끊임없는 필요를 채워 주지 않으면 양떼는 분명히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게 된다. 목자가 풀 뜯는 곳의 위험한 식물들을 인지하고 그것들로부터 양떼를 지키지
않으면 양떼는 독에 감염되어 고통을 당하거나 죽게 된다. 양들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될 때,
영양가 있는 먹이와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때, 양의 먹이를 세심하게 점검해 줄 때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된다.
양들은 목자가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먹이와 물을 공급해 줄 때, 즉 그들의 물리적 필요가 잘 충족될 때 가장 건강하고 잘
발육하며 성장한다. 양들은 그들의 물리적 필요가 잘 충족될 때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을 띠고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된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자기들끼리 내버려진 양떼는 스스로 먹이와 물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주위에 널린
독초의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양떼를 오랫 동안 방치해 두면 그들은 분명히 죽게 된다. 목자만이
열쇠요 해답이며, 목자만이 양떼의 생명과 양식과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메마른 풀과 영양가 없는 잡초, 심지어는 독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세상이 제공하는 것에 정착해 버린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신선한 물가에서 떠나 방황한다. 바닥이 드러난 샘의 진흙마저 말라가는 것을 쳐다보며 서 있기만 한다. 신선한
샘물을 떠나,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의 환상을 쫓아 방황하지만 결국 발견하는 것은 마실 수 없는 오염된
물인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영역에서, 세상에는 많은 거짓 목자들과 삯꾼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들로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그들은
양을 구원하고 인도해 주며 필요를 채워줄 수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기만으로 많은 양들은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만이 양들의 유익을 구하시고 진심으로 양들의 필요를 채우기 원하신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만이 말할 수
없는 혼의 갈급함과 배고픔을 채워 주실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안에 영적
배고픔이 있는가? 우리 혼에 타는 듯한 목마름이 있는가? 우리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우리는 어디서 찾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메마른 땅에서 메마른 땅으로, 잡초밭에서 잡초밭으로, 텅 빈 초장에서
텅 빈 초장으로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샘도 오아시스도 없는 버려인 광야에서 신기루를
쫓아다니면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몇 분
동안의 강단의 설교와 라디오 방송 또는 TV 메시지를 통해 채움받으려 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서적과
이따금씩 열리는 교회 행사에서 갈급함을 채움받으려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물은 날마다 공급되어야 한다. 양식과 물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저장해 둘 수 없다. 공급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필요를
점검하고 스케줄을 점검하고, 선한 목자께서 여러분의 매일의 공급자가 되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시편에
나오는 진리이다.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고 영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